일본 의원들이 울릉도를 방문하겠다고 하여 시끄러웠다.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것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일본 의원들은 땅 문제보다는 눈길을 끌어보자는 의도가 앞선 것으로 보이지만 일본의 쇼비니즘(맹목적 애국주의)이 점차 도를 더하는 느낌이다.

일본 우익 지성의 한 사람이던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일본의 재무장을 요구하며 할복 자살했다는 뉴스에 젊은 시절 크게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평화의 시대에 의사표현 방식이 그토록 극단적이어야 하는지 의문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인은 친절하고 예의바르지만 국가로서의 일본은 침략적이고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그러나 국가는 개인의 모임이며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집단적인 의사표시가 국가 경영의 기초가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따라서 국가로서의 일본과 개인으로서의 일본인이 서로 상반된 다른 특성으로 묘사된다는 것은 일본인들이 자기 정체성을 잘못 성찰하고 있거나 근본적으로 이중적이라고 밖에는 달리 이해할 수가 없다.

일본 지성인의 이중성은 식민지 시대의 지한파 야나기 무네요시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야나기는 1922년에 '조선의 미술'이라는 평론을 통해 조선 미술의 특질을 비애로 규정하고 조선 예술에 구현돼 있는 비애는 선,그것도 곡선에 의해 구현됐다고 주장한다. 조선 예술의 이런 특성은 주변을 지배한 대륙국가 중국 예술이 형태를 사랑하고 섬나라로서 외세로부터 자유로웠던 일본 예술이 색을 사랑하는 것과 대비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야나기의 글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실제로 그의 글을 읽고 많은 한국인이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야나기는 조선예술의 특질이 비애이고 비애가 곡선에 의해 나타나는 이유를 조선의 지정학적 위치,즉 반도에서 찾고 있다. 조선은 반도국가로서 끊임없이 대륙의 압박을 받았기 때문에 사대를 할 수밖에 없었고 슬플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야나기의 비애론은 반도 운명론에 기초하고 있는데,반도 운명론은 역사학자 이기백 교수가 그의 저서 '국사신론'의 서문에서 그토록 통렬하게 비판한 식민지사관의 핵심이다. 결국 식민지사관에 기초해 조선예술의 비애론과 선이론이 탄생한 것이다. 필자는 야나기의 글을 읽으면서 전혀 감동할 수가 없었고 그의 이론에 대해 동의하기도 어려웠다.

조선의 예술에 비애만 있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며 곡선이 왜 비애의 표상인가? 곡선은 많은 경우 희열을 나타내고 때로는 승천을 묘사하는데 천국으로의 승천까지도 비애인가?

조선과 조선의 예술을 그토록 사랑했다는 야나기의 글이 이 정도이니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당시 일본 지식인들의 이중성을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현재에도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이다. 대표적으로 독도문제를 포함해 교과서를 통한 역사의 왜곡을 보면서 일본의 미래가 매우 어둡다고밖에는 달리 말할 수가 없다. 과거사를 철저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아이들에게까지 왜곡된 역사인식을 심겠다고 하면서 어떻게 상호존중의 토대에서 양국의 미래와 선린외교를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일본은 경제대국이다. 경제대국이지만 장기불황,인구의 고령화,과도한 국가부채와 같은 쉽지 않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미국의 신용등급 하락이 남의 일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할 수 있는 역할은 크다. 그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웃을 배려하는 인식의 전환이 절대적이다. 독도를 문제 삼는 일본에 대해 한국인이 분노하는 이유가 영토 문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문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양국의 미래는 어둡다. 기술의 진보에 따라 국경이 사라져 가고 있는 시대에 이웃이 존경하지 않는 세계의 지도적인 국가가 가능하다고 보는가?

조장옥 < 서강대 경제학 교수 >